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(문단 편집) ===== [[고를리체-타르노프 공세|고를리체-타르누프 선의 돌파]] ===== 팔켄하인도 이제 동부전선에 더 많은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다. 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군이 불리한 상황에 처하면서 이탈리아와 루마니아가 오스트리아-헝가리에게 영토를 양보하지 않으면 전쟁을 선포하겠다는 뜻을 전해왔기 때문이었다. 콘라트와 팔켄하인은 러시아군을 크게 격파하여 이 무례한 국가들이 제정신을 차리게 해주기로 결정하고 러시아 제3군에게 기습 공격을 가할 계획을 짰다. [[4월 9일]], 콘라트는 팔켄하인과 협의한 후 [[4월 15일]]에 서부전선에서 독일군 8개 사단을 차출하여 비밀리에 동부전선으로 이동시켰다. 팔켄하인은 이 사단들로 [[아우구스트 폰 마켄젠|마켄젠]]의 지휘 하에 새로이 제11군을 편성하여 고를리체 서쪽에 전개시켰다. 콘라트는 [[아우구스트 폰 마켄젠|마켄젠]]에게 독일 제11군 북쪽의 타르누프 지구에 배치된 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군 제4군과 독일 제11군 남쪽을 지키고 있는 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군 제3군의 지휘권을 넘겨주었다. 이제 22개 보병사단과 1개 기병사단을 보유하게 된 마켄젠 집단군을 맞아 싸우게 된 러시아군은 고를리체를 돌파당하고 남쪽과 북쪽 측면에서 공격을 당하자 러시아군은 결국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. 이 후 러시아군은 한달 후에 다시 반격에 나섰지만,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도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. [[5월 25일]],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했지만, 이것이 당장 러시아군의 상황을 개선시켜주지는 못했다. 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군은 [[6월 3일]]이 되어서야 이탈리아 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키기 시작했고, 그 빈자리는 독일군이 채웠다. 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군 제3군은 해산되었고, 예하 사단들은 [[갈리치아-로도메리아 왕국|갈리치아]]의 수도 [[르비우|렘베르크]]를 탈환한다는 새로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제2군과 제4군에 나뉘어 배치되거나 독일 제11군의 일부로도 편입되었다. 콘라트는 [[아우구스트 폰 마켄젠|마켄젠]]과 함께 [[6월 12일]] 공세를 재개하였고, [[알렉세이 브루실로프|브루실로프]]는 렘베르크를 버리고 퇴각했다. 고를리체-타르누프 전투와 렘베르크 전투 이후 바로 이어진 제3차 바르샤바 전투는 러시아에게 연속적인 패배와 함께 [[타넨베르크 전투|타넨베르크의 참패]]보다도 큰 타격을 안겨주었다. 15개 러시아군 사단은 문자 그대로 전멸당했고, 다른 20개 이상의 사단들도 전력이 바닥이 났다. 콘라트는 러시아가 점령한 갈리치아를 다시 되찾은 것이다. [[1915년]] [[5월]]과 [[7월]] 사이에 이어진 승리로 [[프리비슬린스키|폴란드 돌출부]]가 제거되면서 전선의 길이는 약 800마일로 줄어들었다. 러시아군은 여전히 [[동부전선]]에서 [[동맹국]]보다 수적으로 우세했지만, 이 전투로 160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고 추정되었다. 이 공로로 콘라트는 [[1915년]] [[6월 23일]]에 여러 훈장을 수여받는것과 동시에 [[상급대장]]으로 진급하였다. 이는 한달 전, 오스트리아 역사상 최초로 [[상급대장]]에 진급한 [[오이겐 폰 외스터라이히테셴|오이겐 대공]]이후로 두번째 [[상급대장]]의 탄생이었다.[* 물론 앞서 말했듯이 콘라트의 [[상급대장]] 진급은 독일군에 대한 지휘권 확보라는 목적도 다분했다.] [[에리히 폰 팔켄하인|팔켄하인]]-콘라트 콤비가 러시아군을 영구히 무력화시키기 위해 짠 계획은 완전히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. 가을이 되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, 일단 동부전선은 대충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한 팔켄하인은 동부전선의 병력을 다시 서부전선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. 그러나 오스트리아-헝가리의 상황은 러시아보다 나을 것이 별로 없었다. 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군도 보급 물자의 부족과 엄청난 사상자 수로 인해 빈사 상태에 빠져 있었다. 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군은 겨울 동안 카르파티아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로 8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고, 1915년 여름 전투에서는 그 수가 125만 명으로 늘어났다. 이런 타격을 입고도 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군의 전선이 무너지지 않았던 것은 독일군의 막대한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. [[독일 제국군]] 육군 최고 사령부(Oberste Heeresleitung, 이하 OHL)가 사실상 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군 전체를 지휘하고 독일군의 목표가 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군의 군사 행동에 중요한 결정 요소로 작용하게 되면서 이제 [[합스부르크 가문]]은 [[호엔촐레른 가문]]에게 조종당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. 또 전쟁 초반 제국의 곡창지대 중 하나인 갈리치아를 상당수 상실한데다 농업의 기계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부분의 농촌 장정들이 징집되는 바람에 예년 농업 생산량을 유지하는 것도 힘겨워진 판에 협상국의 해상 봉쇄까지 겹치면서 오스트리아-헝가리도 독일의 [[순무의 겨울]]에 비견할 정도의 [[https://doverequiem1914.tistory.com/112|심각한 식량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]].[* 독일의 순무의 겨울은 그나마 전쟁 발발 2년 후인 1916년부터 발생했지. 오스트리아-헝가리는 무려 대전쟁 발발 약 2개월 후인 1914년 10월부터 식량난을 겪기 시작했다.] 동년 9월, 콘라트는 로브노(Rovno)에 대한 공세를 개시하면서 마지막으로 독자적인 작전을 시도해 보았지만,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갔다. 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군은 사실상 붕괴에 직면하게 된 상태가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